탁월한 외교정책의 군주

2005. 5. 17. 02:47태그삽화용사진

임찬순 칼럼집, 뒷목출판사, 詩人이 괴로워하는 사회
    1, 우리시대 위징은 있는가____탁월한 외교정책의 군주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부제가 달린 광해군을 읽고 「역사의 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시퍼런 칼날로 시간과 공간을 내리쳐서 그 맨 밑바닥에 깊이 감추어진 진실을 꺼내어 햇빛을 쬐는가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사책에 올라 앉은 광해군은 오로지 패배자, 폭군, 혼주, 패주이고 조선조를 27대나 이은 왕 가운데 그 흔한 宗과 祖 하나를 차지하지 못하고 쫒겨난 군주로 우리들 인식 속에 깊이 갇혀 있으나, 그 뚜껑 속에 숨겨 있는 진실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폈다」는 새로운 역사적 가치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 기록된 역사는 수도 없이 많다.
예컨데, 4.19정신을 이었다고 큰소리 친 5.16혁명이 하루 아침에 군사쿠데타로 전락하고, 동학난이 동학혁명으로 정정되기도 한다.

광해군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 간 시대착오적인 사건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광해를 왕의 자리에서 내쫒은 일 자체가 조선후기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한다.

우리는 국사를 배우면서 그가 격변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한 뛰어난 능력의 왕이라는 생각은 거의 한번도 못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후궁의 둘째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얼결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보위에 오르기 까지 장장 17년간을 불안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1608년부터 1623년까지 15년간 왕관을 썼으나 정권장악에 혈안이 된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폐위되었다.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군을 살해했으며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유배 당했고 다시 교동으로, 제주도로 전전하면서 19년을 더 살다가 1641년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아들은 탈출하다 죽고, 며느리는 뒤따라 자결하고, 그로 인해 왕비마저 충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재위 15년간 전란으로 피폐된 민생과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고 농민을 위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허준의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그때 만주를 점령한 누루하치가 後金(뒤에 淸이라 고침)을 세우고 명나라를 깨뜨리려 전쟁을 일으켰다. 명은 전쟁때 망하려는 너희를 구해 줬으니 은혜를 갚아라...하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광해군은 두 나라의 싸움에 끼어들면 조선은 망한다. 명과는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면서 강한 후금의 침략을 막는다. 그런 속에서 최악을 대비한 우리 스스로의 실력을 쌓는다...는 매우 뛰어난 실리외교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왕이 된 인조와 서인들은 청을 깔보고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허리굽혀 섬기다가 오히려 역으로 청나라에게 깨지게 되어 1936년 12월 10일 인조는 청 태종에게 언 땅에 무릎을 꿇고 세번 절하고 아홉번 허리를 굽히는 이른바 三軌九服의 치욕을 당했고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은 10년간 볼모로 끌려 갔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따르지 않은 댓가를 치른것이다

광복 이후 우리의 대통령들이나 국민들이 불러들인 비극도 모조리 시대착오적인 것들이다. 민주주의 한복판에서 이승만의 장기집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가 그것이다

어찌 그들 뿐이겠는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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