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홍커우 공원의 불꽃

2005. 5. 6. 19:55태그삽화용사진

임찬순 칼럼집, 뒷목출판사, 詩人이 괴로워하는 사회

1, 우리시대 위징은 있는가____상해 홍커우 공원의 불꽃
    그 해 4월 29일, 타국만리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터진 하늘을 찢는 폭음은 일본을 경악시켰고, 중국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으며, 상해 임정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그곳에 우뚝 서 있던 대한의 스물다섯 젊은 사나이...윤봉길,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폭탄을 던진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해란 1932년을 말한다. 그 해 1월, 이봉창은 일본 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만일 그게 성공했다면 일본의 경악, 중국의 감탄, 상해 임정의 환호는 그 백배에 달했을 것이다.

    이봉창과 윤봉길 사이에 연결된 끈을 쥐고 있던 사람은 김구였다. 그 해 12월 19일 7시 20분, 일본 오사카의 가네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윤봉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는 곧 세계대전이 일어 나고 그러면 우리나라는 독립할 것이다...라는 정확한 예언을 남겼다 한다.

    그때 그의 고향 예산군 덕산면 시양리 178번지에서는 한살 위인 꽃다운 신부 배용순이 남편이 죽은것도 모른채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梅軒 윤봉길(1908~1932)은 이미 그의 고향에서 3권의 시집을 낸바 있는 시인이었으나, 그 무렵 그의 운명을 바꾸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어느날 웬 중년이 나무 장작을 품에 가득 안고 찾아 와서 그것을 땅바닥에 쏟아 놓으며 「이 가운데서 우리 아버지의 성명 석자가 있는지 봐주시요. 김춘성이라는...」하고 말했다

    중년이 내려 놓은 장작은 묘지에 성명을 써서 꽂아 놓은 묘표였다.

    매헌이 무심코 김춘성이란 비목을 찾아 주자 무식꾼이었던 중년은 뛸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윤봉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화들짝 놀랐다.

    『여러 무덤에서 이걸 뽑아 오면서 표시는 해둔겁니까?』하고 묻자 중년은 「표시라구요? 아, 아닌데...헉!」하고 당황해 했다.

    매헌이 놀라며 『뭐, 뭐요? 그렇다면 댁의 선친 무덤을 어떻게 찾고, 남의 부모 산소는 어쩝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아뿔싸하며 풀썩 주저 앉았다.

    윤봉길은 식민지 치하에 내 던져진 이같은 농민들의 무지에 대한 절망과 충격을 받고 분연히 일어섰다.

    『무식을 추방해야 한다. 무식이야말로 왜놈보다 더 무서운 현실의 적이다. 무식퇴치, 그리고 왜놈퇴치.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2대 사명이고 당면과제이다』라고 외치고 그것을 일생의 전략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농민독본 3권을 직접 쓰고, 농촌 계몽운동에 뛰어 들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어 지자 몸을 던져 구국의 길로 나서기로 결심하고 1930년 3월 6일 『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고국을 떠남에 살아서는 돌아 오지 않으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상해로 망명했고 長天節에 일본군 백천대장 등을 쓰러뜨려 일본을 향한 권선징악의 응징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월에 매헌을 생각하며 못된 일본을 절대로 잊거나 용서하지 말자는 결의를 새삼 다져야 한다.

    일왕, 우파, 자민당, 야쿠자로 연결되는 일본은 아직도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시키면서 헛된 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새 총리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