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칼럼집, 뒷목출판사, 詩人이 괴로워하는 사회
1, 우리시대 위징은 있는가____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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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신간을 읽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아홉가지를 다 갖추었으나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갖추지 못한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전자부터 따져 보자면 이렇다.
조선왕조 500년동안 가장 특별한 인물 다섯명 가운데 꼽힐 송시열의 명성은 대단했다
예컨데 도학의 이황, 학문의 이이, 덕치의 조광조, 예학의 김장생, 의리의 송시열이 그들이다.
그가 세운 기록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첫째
조선실록 전체를 뒤져도 송시열만큼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사람은 없다 한다
그 숫자를 헤아려 보니 무려 3천번이었다 한다. 세종대왕, 이퇴계, 이율곡도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뜻이다.
둘째
그는 1623년 인조 11년에 생원시에 장원하여 정9품의 벼슬길에 오른 이래 57년간 인조, 효종, 숙종임금에 의해 167회에 걸쳐 벼슬을 내렸으나 그에 응한것은 단 37회 뿐이었다.
거절할 때마다 등급이 올라가곤 했다. 그는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는 행운도 얻었다. 그가 훗날 효종이 되어 특별한 관계 "북벌론"을 맺었기 때문이다,
세째
그의 제자가 맹자를 천번이나 읽었다는게 사실입니까...하고 묻자
나는 열네살때 맹자를 읽기 시작한 이래 몇천번도 더 읽었다...고 말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자리에서 연거푸 오백번이나 읽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네째
그는 맹자나 주자처럼 宋子로 불리는 영광을 누렸다. 『유교 국가에서 성 뒤에 자자를 붙이는 것은 그 인물을 성현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한때 이이와 이황이 李子로 불린적이 있으나 송시열이 송자로 존중된 것은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고 또 국가차원의 높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宋子大典이 정조의 명에 의해 국비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의 검소함은 가히 극에 달해 있었다. 그의 부모가 가난하여 생전에 요를 깔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그도 일생을 그렇게 살았다 한다.
조복은 비단옷이 아닌 무명옷을 입었고 망건에는 금관자를 달지 않았다. 1689년 6월 8일 84세로 정읍에서 숙종에게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장만 깔려 있어서 자리가 누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가 권하자
『우리 선인께서는 돌아 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가지셨다』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변화를 지키는데 목숨을 걸지 않고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의 당 노론은 조선이 망할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그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고 작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후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책 이름이 『그들의 나라』가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대통령과 여당의 나라, 또는 야당의 나라, 국회의 나라, 요컨데 정치인의 나라가 아니다.
영남의 나라도 호남의 나라도 아니고 군인, 경찰, 공무원, 재벌, 시민연대, 데모하는 사람들의 나라도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국민의 나라』임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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