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소설인지 史實사실인지......아시는 분~~~~~~~

2020. 3. 26. 17:19신문잡지...옮김




독립군 시절 장준하(왼쪽), 관동군 시절 박정희(오른쪽)

장준하와 박정희
시대와 불화했던 이 땅의 청년들이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동경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 다니던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 파병되었다.

입영 6개월 만에 부대를 탈영한 그는 죽음을 무릎 쓴 탈주 끝에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했다.
독립군을 양성하던 군사학교다.
광복군에서 활약한 그는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해방후 귀국직전 장준하(右) ,김준엽(中), 노능서(좌)
 
장준하보다 9개월 먼저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만주 군관학교에 응시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박정희는 굴하지 않고 혈서를 쓰고 간청하여 입학했다.

만주군관학교 2학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육사 동기생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며 일본어로 지껼였다고 일본신문이 꼬집었지만
국내 신문에는 한줄도 실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박정희
 
 


血書
軍官志願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で送付されて捅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つゞ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
창씨개명한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라고
맹세하고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견마(犬馬)가 무엇인가?
천황의 개가 되겠다는 뜻이다.
 
만주 관동군은 독립군을 때려잡는 부대다.
조선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한사람은 광복군으로 또 한사람은 광복군을 소탕하는 부대원이 된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시청앞에서 쿠데타군을 지휘하고 있는 육군소장 박정희. 양옆에 긴장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은 좌지철 우석재.

박정희 18년 집권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갈등했다.
박정희 정치 역정 중에서 최대의 라이벌은 김대중이었고 최고의 정적은 장준하였다.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을 표방하며 정치적으로 맞섰고
장준하는 ‘사상계’로 각을 세웠다.
김대중은 눈에 가시였고 장준하는 목에 가시였다.

박정희의 가슴에 불을 지른 여인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다'
숙군(肅軍) 수사 팀에 구속된 박정희 소령이 절박한 상황에서
동거녀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 고백한 내용이다.

'여덟 살 아래인 그녀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이때 이현란이라는 여인이 없었고,
박정희가 달아났다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越北)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 동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조갑제가 집필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초판 제2220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사에서 잔뼈가 굵은 박정희교 추종자 조갑제가 한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박정희(우)와 이현란(좌), 가운데는 박정희 누나 박재희
 
여기에서 잠간, 박정희의 첫사랑 이현란을 짚어보자.
박정희가 처음 이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한 시기는 1947년 가을이다.
서울에서 조선경비사관학교(훗날 육사) 교관으로 근무할 때,
춘천에 근무하던 친구 김경원 대위가 장가간다는 청첩장을 보내왔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예식장에 도착한 그는 많은 하객 중에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신부의 들러리를 서고 있는 여자였다.
특히 아랫입술이 환상이었다.

박정희는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하면서 몽롱한 현기증을 느꼈다.
빛이 나는 여인을 처음 봤을 때 느끼는 감전의 느낌이었다.
한국여자, 중국여자, 일본여자, 러시아여자 등
많은 여인을 안아봤지만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유난히 빛이 나던 그녀, 너는 누구냐?

첫눈에 박정희를 사로잡은 여인은 이현란이었다.
그녀는 원산 루시여고를 졸업하고 단신으로 월남하여
이화여대 재학 중인 미모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박정희는 돌격작전 하듯 그녀를 공략했다.
외모에는 밀리지만 속공과 뚝심에 그녀가 무너졌다.
법적으로 본부인과 아직 혼인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유부남 신분이었던 박정희는
겁도없이 약혼을 하고 용산 군인 관사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는 30세에 이현란을 만나 생애 처음으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다까끼 마사오로 살았던 만주 군관시절 이래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이현란은 본부인 김호남과 이혼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나와 헤어지자고 요구했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출을 반복하고
음독자살을 기도하며 박정희를 압박했다.

30대의 청년 박정희는 동년배의 장준하, 김준엽 등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어 일제와 싸울 때,
자신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해방 조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위험을 느낀 그는 신분세탁의 대열에 끼어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만난 미모의 이현란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심리적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셋째 형 박상희(김종필장인)
<10월 대구항쟁사건>에서 경찰에 사살된 복수심과
좌익세력과의 접촉으로 남로당에 가입하게 되고,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랑하는 여인과 갈등을 겪었다.


광주에 설치된 토벌사령부에 파견되어 송호성(우) 사령관과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박정희(좌)

이현란과 동거 2달 후, 194810. 여순 사건이 터졌다.
제주에서 소요사태가 터지자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에
제주에 출동하여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방첩대의 추적에 전전긍긍하던 인사계 상사 지창수는
국군이 자국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동조한 김지회 중위와 함께 여수 순천을 장악한 반군은
토벌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박정희는
전라남도 광주에 설치된 토벌사령부에 차출되었다.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줄 모르고 파견한 것이다.
그 당시 박정희는 육군내 작전 1인자였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배운 실력으로 소위로 임관한 뒤
한국군 최초로 연대급 전술훈련을 입안하여
중위를 건너뛰고 대위로 특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능력도 사상의 하위 존재,
특무대의 그물망에 그가 부상하자 육군 지휘부는 그를 원대복귀시켰다.

공산당이 싫어서 삼팔선을 넘어왔는데 내가 왜 공산당원하고 살아야 하느냐?
나하고 살고 싶거든 남로당을 청산하고 그렇잖으면 헤어지자
이현란의 결별통보가 점점 수위를 높여갈 무렵 그는 방첩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녀는 박정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아기는 6개월 만에 죽었다. 넌 니 애비 얼굴도 못보고 죽었구나
이현란은 아기의 시신을 빨간 관에 담아 김학림 부인과 함께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어준 후,
용산을 떠났다.

김학림은 박정희의 만주 군관학교 후배다.
육사 교관시절. 태릉 민가에 세들어 살던 김학림의 집에 박정희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누추한 초가집이었지만 박정희와 김학림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밀담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들어가면 얘기를 멈추는 거예요,
그리고 박정희가 갈 때면 우리 남편을 데리고 나가 귓속말을 나누는 거예요.
새색시인 저는 그 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박정희가 잡혀가고
우리 남편이 잡혀가는 걸 보고 그들이 나눈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았어요.
그런데, 박정희는 나오고 우리 남편은 죽었어요. 박정희는 배신자에요.”
일본에 살고 있는 김학림 부인의 회고다.

그 후, 6.25가 터져 서로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박정희와 이현란은 전쟁 와중에 우연히 조우했다.
박정희와 헤어진 후 영등포에서 교사로 재직 중,
동료교사와 눈이 맞은 이현란은 그 남자와 대구로 피난와 임신 2개월이었다.
그녀가 동성로를 걷고 있을 때, 군 찦차가 크락숀을 울리며 멈춤과 동시에
앞자리에 앉아있던 검은 선 그라스를 낀 사나이가 내렸다.
박정희 소령이었다.

감옥에서 죽었거나 이북으로 도망간 줄 알았는데
버젓이 군복 입은 박정희를 보니 무서워서 나 살려라하고 뛰었다.
훗날, 이현란의 술회다.


박정희 첫부인 김호남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박근혜의 어머니 육영수가 본부인이고
박근혜가 장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는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학교 재학 중 193641일 첫 부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남로당 세포로 암약하다 방첩대에 체포된 박정희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문경초등학교에 부임하여 4년간 선생노릇을 했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박정희의 큰딸 박재옥이다.
김호남과 금슬이 좋지 않던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직하고 만주로 가버렸다.
만주 관동군과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패망과 함께 조국이 해방되자
은근슬쩍 국군에 들어가 신분세탁을 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소령으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남로당 육군 세포가 되어 공산당 활동을 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방첩대(보안사령부)가 박정희를 구속하고 집중 추궁했다.
국군에 암약하고 있는 남로당 명단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지하 독방에서 고문에 시달리던 그에게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이 보낸 사람이 찾아와
연루자를 불면 목숨은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죽음의 계곡에서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동료들의 리스트를 넘겨주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았다.

박정희로부터 명단을 넘겨받은 방첩대장 김창룡은 대대적인 숙군 작업에 들어갔다.
194810월부터 19497월까지 진행된 숙군작업에는
전 군()의 약 5%에 해당하는 4749명이 연루되었으며 2000여 명이 총살당했다.
박정희는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다.


1949년 사형판결을 받은 39명의 사형수들이 서울 근교에서 형틀에 묶이고 있다 NARA


사격준비 NARA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의 시신을 관에 담으려 줄을 풀고있다 NARA


사형수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NARA


박정희가 죽음을 맞이했던 궁정동 안가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1979. 1026.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는
박정희가 안가에 불러들인 여자가 어림잡아 200명 이상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 안가를 살펴보고 가자.
안가(安家)는 안전가옥의 줄임말이다.
YS때 헐려 지금은 무궁화동산이라는 공원으로 변했지만
79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만을 위한 가옥이 청와대 옆 궁정동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질펀한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박정희가 색욕을 배설하는 곳이었다.

당시 권력구조는 박정희를 정점으로 좌지철 우재규였다.
경호실은 차지철이 대장이었고, 중앙정보부는 김재규가 캡이었다.
하지만 삼정승에도 좌의정 서열이 높듯이 차지철이 갑(甲)에 군림하려 들었다.
안가가 청와대 권역임에도 경비와 관리를 중정이 담당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회 준비와 여자 조달도 중앙정보부가 맡았다.
경호실이 갑이니 중정은 을(乙)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19791026, 금요일 오후.
대통령을 수행하여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다녀온 차지철이
남산에 있던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6시에 안가로 들어오라고 했다.
대통령의 명령을 전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차지철이 들어오라는 것처럼 들려 불쾌했다.
분노한 김재규는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차지철을죽여 버릴 것이라고 소리 질렀다.
김계원은 다혈질인 김재규가 흥분해서 그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재규의 스팀 발산은 비단 오늘일 뿐만이 아니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렸고 부딪치면 파열음이 났다.

좌지철 우재규의 피를 말리는 암투
 
박정희와 김재규는 경북 구미 동향이다.
9살 나이 차이가 나지만 육사 2기 동기다.
이러한 지연과 학연으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끈끈한 유대감이 강했다.

반면, 차지철은 비록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5.16 당시 육군 대위로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박정희의 호위무사 노릇을 했다.
목숨을 건 그 당당함으로그때 너는 뭐했느냐?”는 반감이 뿌리 깊었다.
진골(眞骨)싸움이다.

사실, 5.16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김재규는
반혁명분자로 찍혀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구명으로 살아났다.


평소의 차지철()과 김재규()
 
김재규로부터 연락을 받은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프라자 호텔에서 모델 신재순을 태우고
내자 호텔에서 가수 심수봉을 픽업하여 안가에 도착했다.
신재순은 청와대 콜이 몇 번째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심수봉은 이번이 세 번째다.

우리에게 심수봉은 명지대학 재학시절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불러 화려하게 등장한 신인가수로 알고 있지만
이미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74년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성이 울리자 권총을 들고
대응하는 박종규 경호실장.

러던 어느 날. 대한사격연맹총재 박종규가 주최한 연회에 심수봉이 불려갔다.
그녀가 일본 엔까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처녀 뱃사공>을 그녀 특유의 창법으로 부르자
전 경호실장 박종규가 가버렸다. 비음 마사지에 피스톨박이 녹아버린 것이다.

최장수 경호실장을 지냈던 박종규는 8.15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육영수저격사건에 책임을 지고 경호실장을 물러났으나 주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런 애는 각하에게 간을 보여야지라고 생각한 그에게 발탁되어
박정희 앞에서 노래를 부른게 4년 전 1975년이었다.
 
피스톨박 주선으로 박정희를 만나게 된 심수봉


75년 당시 박정희(58세)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첫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에 이어 '황성옛터'가
그녀 특유의 비음을 타고 장내에 흐르자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문세광의 흉탄에 육영수를 잃은 박정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심수봉의 기타 선율이 다시 흐르며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나시이 사케 (슬픈 술()’가 심금을 울리자
그렁거리던 눈물이 주름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히또리 사카바데 아지가스루
주점에서 홀로 마시는 술은

와카레 나미다노 아지가스루
이별의 눈물 맛이나요

논데스 데다이 오모가게가
마셔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의 모습이

노메바구라스니 마다 우가부
마신 술잔에 다시 떠오릅니다

아~ !~헤어진 뒤에 남아있는 마음의 슬픔은 미련이련가?
그 사람의 모습 외로움을 잊기 위하여 마시고 있지만
오늘밤도 술은 나를 슬프게 하네요.
술아, 어찌 하면 어찌 하면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있을까? 잊을 수가 있을까?
 
누가 일본 녀석을 데리고 왔어?”
싫지 않은 박정희의 호통에 장내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너는 일본 사람인가?”
아닙니다. 한국사람 입니다.”
또렷한 심수봉의 답에 박정희가 썩소를 날렸다.
이렇게 박정희와 심수봉은 처음 만났다.


현장 검증에서 재현하는 김재규

오후 7.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술을 겸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등장한 양주가 시바스 리갈이다.

730. 자리를 잠간 벗어난 김재규가
수행비서 박흥주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단호한 어투로 지시했다.
박선호는 정인형 경호처장 안재송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대령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738. 김재규가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7
41,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권총을 꺼내 차지철을 겨누었다.

각하! 저따위 버러지 새끼와 정치를 하시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아닙니까?”
사실 이 대사, 이 문장은
합수부가 차실장과 김부장의 알력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라고
아직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시 사용되었던 권총

김재규의 발터 PPK가 불을 뿜었다.
오른 손목을 맞은 차지철이 피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갔다.
임자! 왜이래?”
각하! 이제 그만 하십시오. 하야 하십시오.”

김재규의 손을 떠난 탄환이 박정희를 향했다.
유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신재순의 품으로 쓰러졌다.

배설의 희열도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밤
 
이 때, 그가 총을 맞지 않았으면
자신의 딸보다 어린 신재순을 품고 배설의 희열을 만끽 했을 텐데
그녀 가슴에 피를 뿌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죄와 벌. 그의 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이 그에게 피보다 더 진한 액체를
그녀 몸에 뿌리는 것을 ()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화장실에 피신했던 차지철이 손목에 흐르는 피를 지혈하며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김재규와 마주쳤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식장을 밀치며 저항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당시 현장 사진. 박정희의 시신은 김계원의 지시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었고
1시 방향에 심수봉의 기타와 3시 방향에 차지철의 시신이 있다.

차지철을 쓰러트린 김재규가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박정희로 하여금 우수에 젖게 만든 심수봉은 가희(歌姬)이니까 별로 상처받을 게 없지만
신재순은 박정희의 승은도 받지 못하고 콜걸이라는 이미지만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렸다.

미모의 여대생, 신재순이 누구야?

신재순은 당시 여대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찍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둔 이혼녀였으며
모델 활동을 하면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는
그날 아무 일이 없었으면 탤런트로 잘 나갔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강에 배 지나가면 표가 나느냐?' 라는 잠재의식이 여자들에겐 있나보다.
물받음(承恩)이 수치가 아니라 꽃길이 되고 자랑이 되던 시절 이야기다.
아니, 현재 진행형인지 모르겠다.


현장 검증에 모습을 드러낸 심수봉과 신재순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를 정조준했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확인사살이다.


수청에 동원되었던 여배우와 탈렌트들
 
전두환이 이끄는 합수부는
박선호의 전임 의전과장들을 찾아 청와대 안가 술자리와 여자에 대해 검증했다.
전임 '채홍사' **, **, **(예비역 대령)
입을 열면 깜짝 놀랄만한 여배우와 TV 드라마 스타들과 가수인
C, C, C, L, L, W씨 등이 비밀 안가의 깊숙한 곳까지 거쳐 갔다고 증언했다.
또한 입만 열면 알만한 미모의 H, K씨는 안가의 깊은 곳까지 불려왔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빠져 나갔다는 얘기도 남겼다.

출처 : http://blog.daum.net/k30355k/13747560